1. 미라보레아스
이 괴상하게 생긴 짐승은 PSP게임 '몬스터헌터'의 괴물 중 한 마리인 미라보레아스다. 거의 최종보스급이라고 할 만한 놈인데, 나는 간밤에 밤새도록 이 녀석에게 얻어터지고 짓밟히고 걷어차이고 뭉개지고 들이받히고 하며 이치를 깨우쳤다.
남들이 재미나다는 말에 그만 현혹되어 두어달 전 시작한 몬스터헌터는 이미 생활을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로 심심파적 이상의 놀잇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두어달 동안의 플레이 시간만 벌써 400시간에 육박하니 말 다했다.
사실 게임에 환장을 하고 좋아하기는 하지만 게임실력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라서, 또 바쁜 생활인이라는 핑계를 대고 이미 누군가 만들어 둔 세이브파일 (온갖 아이템과 갑옷, 무기가 구비된) 을 다운받아 즐겼으니 최종보스의 목전까지 이르게 된 것도 실력 때문은 아니요 오로지 아이템빨이라고 하겠다. 그 아이템빨도 점점 어려운 괴물들이 등장하매 결국 얕은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으니, 우캄루바스까지는 장장 일주일에 걸친 혈투 끝에 어찌어찌 잡아내고 말았으나, 훈련소 미션을 새로이 다 거쳐야 나온다는 이 녀석을 다운로드 퀘스트로 미리 접해 보고는 마침내 손을 들고 만 것이다. 도대체 어떤 개새끼가 이런 괴물을 만든거야? 이런걸 어떻게 이기라고! 하고 자못 흥분까지 해가며. 어쨌든 이런 엄청난 괴물의 등장으로 두어달 넘게 빠져 있던 수렵과 채집 생활도 이제는 끝맺음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 미라보레아스로 겪은 분노로 인해 애꿎은 PSP는 감금형을 받아 책상서랍에 갇혀 오랫동안 햇빛을 못보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 그래도 세상에는 이 괴물을 재미삼아 잡아내는 게이머도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몬스터 헌터가 아니라 몬스터 슬로터나 몬스터 버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2. 글짓기는 어려워.
변명을 하자면 이렇게까지 게임에 매달리게 된 연유의 한 가지는 글쓰기에 있었다. 물론 아까 문장에서 확인했다시피 이제부터 할 말은 이치에 닿는 소리가 아니요 어디까지나 어떻게 하면 창피함을 좀 덜어볼까 하는 얕은 꾀에서 나온 변명이므로 내 말씀을 꼭 믿어주셔야할 의무는 없다.
아무튼 변명을 계속 이어보면, 최근에 장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지도 않은 글을 하나 쓰고 있는 바, 어쨌든 쓰고 있노라 하고 선포까지 장하게 해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글짓기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인데, 이게 처음에 먹었던 생각과는 다르게 통 막히기만 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게다. 뭔가 그려볼고 하는 건 눈 앞에서 어룽어룽하건만 어째서 글자들은 떠다니기만 하고 원고지에 박히지는 않는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그렇게 가슴이 콱콱 막히고 답답하니 스트레스 풀겸 콩가나 한번 때려주고 올까 그런 핑계로 수렵과 채집에 몰두했고 그러던 것이 이제는 열일 제쳐두고 그 짓만 하게끔 된 것인데 아무리 매달려도 답이 안나오는 글보다는 그래도 매달리면 진도가 나가주는 게임이 좀 더 쉬웠고 만만했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진척도 보람도 없는 놈의 일에 어느 시러배 아들놈이 매달려 있단 말이냐.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매달려 있게 된 게임인데 이제는 정말로 글짓기보다도 더 어려운 저 미라보레아스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글짓기보다도 오히려 이 게임이 더 어려워지게 된 셈이다. 의지가 약한 나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는 없어도 다행히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빨리 판단하고 포기해 버리는 지혜(?)는 있으니 아무튼 이리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몬스터헌터와는 작별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3. 글짓기가 어려워?
미라보레아스를 만나기 전에는 진도도 안나가고 생각대로 써지지도 않는 글에 그만 화도 나도 짜증스럽기도 하고 실망도 한 나머지 이런 선언을 해버렸다. 세상에 글짓기만큼 어려운 건 없어. 내가 대체 왜 이런 재미도 없고 힘들기만 한 일을 한다고 이 지랄을 하는 거지? 그런데 어제 밤새도록 미라보레아스에게 얻어터지고 짓밟히고 걷어차이고 뭉개지고 들이받히며 생각이 좀 달라지게 되었는데 그건 그래 세상에는 글짓기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많을 거야 하는 생각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런 일이 뭐가 있을지 한번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기로 한다.
미라보레아스 퇴치하기, 형광등 갈아끼우기, 애 낳기(이건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겪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담배 끊기, 1종 보통 운전면허 따기, 동태찌개 끓이기,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기, 연애하기, 텃밭 농사 짓기, 실내 4중주악 들으면서 졸지 않기, 뱃살 빼기, 불법주차 딱지 떼이고 욕 안하기, 마트에서 충동구매 안하기, 이명박 좋아하기, 야한 꿈 안꾸기, 외출할 때 스킨과 로션을 꼭 바르기
이것 봐라. 그냥 한번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글짓기보다 어려운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데. 어찌 보면 글짓기는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도 쉬운 축에 속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4. 글짓기는 쉬워.
그런데 나는 왜 이 놈의 글짓기 때문에 끙끙 앓았는가? 생각해 보니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 가서 그랬던 게 아니었나하는 결론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타격코치가 타자들에게 하는 조언이 있다. "이봐 토미,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 긴장 풀고 공을 끝까지 보라구." 아무튼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것 이게 문제다. 남자에게 힘이 쏠려서 좋을 곳은 어깨가 아니라 다른 곳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쉬운 글짓기인데 왜 그렇게 힘을 주고 어떻게든 잘 써보겠다고 쩔쩔 맸는지 생각해보면 창피한 노릇이다. 그냥 대충 편하게 할 걸. 그렇게만 하면 세상에 글짓기보다 쉬운 일이 어딨나?
나는 그저 편안하게 남이야 보고 뭐라든 내가 쓰는 동안 즐겁도록 어디까지나 좀 유쾌한 여가선용거리로써 글짓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헌데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 보기에 더 좋게 보일 요량을 하고 이렇게 쓰면 나아보일까 저렇게 쓰면 고와보일까 궁리를 하니 글은 글대로 안 써지고 답답하고 짜증만 나서 그만 결국에는 글쓰기에다 '어렵다'라는 말도 안되는 레테르를 붙여버리고 에이 저런 두통거리하며 홀대를 하고 만 것이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 보라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새글쓰기를 클릭하고 마음나가는 대로 쓰니 그럭저럭 글이 하나 되지 않는가? 글짓기 거 얼마나 쉽냐? 미라보레아스랑은 비교도 안되지 않나?
아무튼 이런 깨달음을 간밤의 미라보레아스와의 격투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비록 폴리곤과 몇 바이트의 정보로 이루어진 게임기 속의 괴수라고 하나 이런 깨달음을 주었으니 고맙기 그지 없는 노릇이다. 음 말을 고쳐야겠다. 내가 미라보레아스를 잡지 않는 까닭은 그녀석이 어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녀석에게 얻은 깨달음 때문에 존경심이 생겨서라고.